핀란드의 강인함이 드러난 겨울 전쟁 비화

"전쟁은 피를 흘리는 외교이며, 외교는 피를 흘리지 않는 전쟁이다"라는 말이 있다.


겨울 전쟁에 이어 소련과 핀란드 사이에서의 계속된 전쟁은, 이 말이 실감이 된 케이스도 없을 것이다.



겨울 전쟁에서 핀란드 대 소련이라는 구도였지만, 계속 된 전쟁에서는 독일이 끼어들었기 때문에 좀 더 복잡한 구도가 되어가고 있었다. 겨울 전쟁 이후, 소련은 핀란드의 물자의 수출입을 금지, 경제적으로 압박하는 한편, 다양한 형태의 내정 간섭을 하고있었고, 이를 통해 핀란드는 경제 상황이 악화되고 있었다.


거기에 손을 내민 것은 독일이었다.


이 상황에서 핀란드는 좋던 싫던간에 관계없이, 독일과의 관계를 심화, 민생 용 물자의 90%까지 독일에서 수입하게되었고, 1940년 8월 양국은 밀약을 맺고, 독일군이 핀란드에 비밀리에 주둔하게 된다.



겨울 전쟁에서 그렇게 원조는 없었지만, 연합국 측에서는 동정적인 눈으로 봐왔던 핀란드였지만, 이 일련의 움직임으로 인해 연합국으로부터 추축군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실제로 당시 대통령이었던 리스트 헤이키 류티는 광신적 인 나치 추종자라고까지 볼 수 있었다.




1941년, 독일의 "바르바로사 작전"과 거의 궤를 같이해 핀란드는 대소 전쟁에 투입, 독일군의 파죽지세로 진격하는데 힘입어 한때 "겨울 전쟁" 이전의 국경선을 회복하게 된다. 그러나, 독일이 스탈린 그라드 전투에서 대패, 소련군의 반격이 시작되자, 핀란드에 갑자기 위기가 찾아오게되는데...


그리고 마침내 1944년 6월 9일, 5500문의 대포와 900문 가까이의 로켓포와 함께 45만명의 소련군이 진격.



겨울 전쟁에서는 그래도 힘없던 핀란드가 소련을 괴롭혔었지만, 이번에는 사정이 달랐다. 왜냐하면 겨울 전쟁은 말그대로 겨울이었고, 지금은 초여름. 간간히 버티기는 했지만, 대국 소련을 상대하기는 역부족.


절대 불리했던 핀란드 군은 "이로만쯔 전투"에서 핀란드 군이 불굴의 투지를 보인 것은, 결과적으로는 강화 협상에 영향을 끼졌다고 말할 수 있다. 그때까지 소련은 핀란드가 추축국으로부터 분리, 단독 강화를 요구해도, 무조건 항복 이외에 협상 테이블에 앉지 않을 것이라 생각...



그러나 핀란드가 방어선을 후퇴하면서까지 전선을 유지, 끈질기게 저항을 계속하는 사이에 소련은 그동안의 완고한 태도를 바꾸는 두 가지 요소가 발생했다. 하나는 불굴의 저항을 보여주는 핀란드를 무조건 항복으로 몰아넣는 것은 당초 예상보다 훨씬 어렵다는 인식. 그리고 동부 전선에서 소련은 드디어 불가리아와 루마니아 등 추축국 측의 나라에 침공을 함에 있어서, 핀란드에 관대 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하기 시작 한 것이다.




전쟁의 주 목적이 독일에 승리, 그것도 신속한 승리를 필요로하는 소련에게, 핀란드에 시간이 걸리는 것은 좋지 않은 일.


핀란드 류티 대통령은 한 때 독일 외무장관 리벤트롭 사이에서 "마지막까지 추축국의 일원으로 전투를 계속"이라고 다짐. 그리고 "친독 노선"은 자신 개인의 판단이라는 형태로 하여 자신이 퇴진하면, 소련과의 협상이 가능하다는 방법을 취했다는.



물론 이것은 궤변이다.


그러나 소련과 단독 강화하기 위해 소국이 스스로의 독립을 지키기 위한 필사적인 궤변이라는 사실.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에게 대통령직을 물려 준 튜치는, 이에 따라 모든 책임을 스스로지고 전후 나치 독일에 가담한 것으로 연합국으로부터 전범으로 체포, 복역하게 된다.


그러나 핀란드 국민은 그의 행동이 국가를 구하기 위해 자기 희생임을 이해하고 있었다. 핀란드 국민이 뽑은 "위대한 핀란드 인"의 1위는 만네르헤임 대통령이지만, 2위는 류티 대통령이 선택된 것.


강화의 조건은 핀란드에게 어려운 것임에는 변함이 없으나, 처음부터 무조건 항복이 아닌데다, 핀란드에 소련군이 "주둔"하는 것은 철저히 막았었다는.


핀란드는 독립을 지켰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