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최대의 시가전! 스탈린 그라드 전투

스탈린 그라드 전투에서는, 독일군이 시가전에 총 전력을 투입하여 싸웠지만, 소련군이 지킨 것으로 독일군이 큰 타격을 받았던 싸움이다. 이 전투로, 소련군의 반격의 계기가 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의 종결을 향해 치달았었던 싸움이기도 했었다. 


<1942년 가을, 독일이 공격을 시작했을 무렵은 스탈린 그라드는 가볍게 함락될 것으로 생각.>


스탈린 그라드에서 총 공세를 퍼부었지만 실패하여, 독일군이 재기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1941년 6월 바르바로사 작전의 실패로 소련에 쳐들어갔던 독일군, 레닌 그라드도 모스쿠아도 점령하지 못한 채 스탈린 그라드로 표적을 변경한다.


스탈린 그라드 폭격. 

독일군의 맹렬한 공습에 의해 스탈린 그라드의 시가지는 초토화되었다.


1941년 6월 21일,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전날, 독일군 동부 전선 배치 병력으로는 병력 300만명, 전차 3580대, 대포 7184문, 차량 60만대, 말 75만 마리, 항공기 1830대. 이에 대적한 소련군은 병력 450만명, 10개 군이었다.




1941년부터 1942년에 걸친 겨울 한파 속, 모스크바 앞에서 소련 붉은 군대의 반격에 독일군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게된다. 목표로 한 모스크바 레닌 그라드는 함락하지 못했고, 독일군은 볼가 강에 의한 군수 물자의 보급로를 차단하려고 스탈린 그라드(현 볼고그라드)에 병력을 집중해 공격.


독일군이 스탈린 그라드에 도착하기 전, 스탈린 그라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습이 이루어졌다.


1941~1942년 소련군은 총공세를 버터내었고, 독일군은 전력을 다시 갖추고, 1942년 4월, 남부 집단군에 주력군을 배치하고, 스탈린 그라드, 카프카스를 공격하는 "브라우저" 전략을 수립.


1942~43년, 장포신 5센티미터 포장비의 Ⅳ 호 전차

독일군은 시가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독일 육군의 전차 부대 등이 배치되었다.


1943년 1월 저격하는 소련군

소련의 군인들은 겨울에 흰 옷을 입고, 건물 위에서 저격을 실시.




모스크바보다 훨씬 남쪽 카프카스 지방과 볼가 강에 이르는 남부 러시아를 정복하려는 결의를 다진, 종국적 승리를 목표로 한 이 대공세는 브라우저 작전이라고 명명되었다.


불 탄 스탈린 그라드 시내

건물의 대부분이 소실되어 버리고, 잿더미 같은 시가지의 전쟁이 되었다.


스탈린 그라드는 모스크바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흑해에 인접해 있는 교통의 요지. 스탈린 그라드는 석유를 가득 실은 유조선의 중요한 중계 기지 일뿐만 아니라 철도 수송에도 중요한 기지로서 말하자면 수륙에 대 보급 기지였다. 


영웅 탄생 바실리 자이체프...

바실리 자이체프(Vasily Zaytsev)는 소련군의 저격수로서, 스탈린 그라드 전투에서 독일 장교를 중심으로 다수의 중요 인물을 저격 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독일은 모스크바, 레닌 그라드를 점령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1943년 6월부터 시작된 사상 최대의 시가전이라고 할 수 있는 스탈린 그라드 전투에 의해 독일군은 괴멸 상태라고도 할 정도의 대 패배.


건물을 저격하는 군인

흰 옷을 입고 건물에 대한 저격을 실시하고 있다. 서로 엄청난 희생자 수를 내고, 작은 건물에 의지한 싸움이 대부분이었다.


이로서 제2차 세계 대전의 막은 서서히 내려가게 되었고, 역으로 소련이 독일의 베를린을 점령하게 되는 단초를 제공했다. 한마디로 스탈린 그라드의 실패가 패망의 원인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