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가 패션에 영향을 준 10가지 사례

아돌프 히틀러가 카리스마적 지배를 했었던 나치(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은 여전히 그 흔적들을 계속 남기고 있다.


사상 최악의 전쟁을 일으켰고, 후세에 꺼지지 않는 부정적인 유산을 남겼다고 되어 있는데, 나치 독일은 여전히 모든 방면에 영향을 주고 있다.


그것은 패션계도 예외는 아니다. 나치가 패션의 세계에 영향을 준 10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10. 브랜딩 능력에 능했다



그들은 브랜드화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나치 정권의 선전에 앞장 섰던 오제프 괴벨스는 초라한 야전 옷은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심어줄 수 없다고 생각. 멋지고 강렬한 유니폼이라면 입고 있는 사람을 가능한 한 장신이며 당당한 체구로 보여줄 수 있고, 상대에게 강렬한 인상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괴벨스는 특히 패션에 대해 더 완벽을 요구했던 한 사람으로, 소문에 의하면 수백 정장을 가지고 있었고, 1년 사이에 두 번 같은 옷을 입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


괴벨스는 인상적인 외모를 계속 고집하여, 나치가 강한 존재 인 브랜드 이미지를 주위에 심어 나갔다.


군의 침략과 패션이 여기까지 효과적으로 결합 된 예는 일찌기 없었다. 이것은 큰 영향을 주었고, 이후 고급 패션계에서는 군복, 특히 나치의 영향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9. 그들의 군복은 여전히 악의 상징



1930년대에 탄생 한 이래, 나치의 제복은 "악역" 의상 디자인의 기준이되고 있다. 나치의 범죄 스케일의 크기를 감안하면, 현대의 픽션이 악당을 자주 나치 스타일로 그리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나치즘이라고 하면 관객은 곧 악당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영화에서도 몇 번 선보였는데, 예를 들어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 제국의 역습"에서도 은하 제국의 군복은 틀림없이 제3제국의 것이다. 루카스 자신도 그것을 인정하고 있다.




"우리가 처음으로 영화에서 사용한 의상은 나치의 것과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그 유니폼은 매우 권위적이고 바로 제국주의 자체니까....."


8. 코코 샤넬과 나치의 관계



히틀러의 군대가 유럽을 침공하기 시작했을 때, 가브리엘 샤넬은 이미 패션 디자이너로서의 지위를 확립하고 있었다.


코코라는 애칭으로 알려진 그녀는, 널리 알려진 세계 최고 브랜드 "샤넬"의 창시자이다. 그러나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함으로써, 샤넬은 이상한 방식으로 슈퍼 스타에 오를 수 있게되었다.


나치에 저항하거나 숨는 것이 아니라, 샤넬은 효과적으로 그들의 규칙을 영입한 것이다. 한스 군터 폰 딩클라그의 애인으로, 스파이 활동을 실시. 제3제국으로의 권유를 도왔다.


전후, 샤넬은 배신 행위에 대해 규탄받지 않고, 바로 프랑스 패션계의 유명 디자이너로서의 지위를 되찾고 자신의 제국을 구축했다. 오히려 샤넬과 나치 독일과의 관계의 소문이 이상한 수수께끼 분위기와 불사조 같은 이미지를 떠올려 샤넬 브랜드의 지명도를 높여주는 결과로 되었다.


7. 수염



일단 사람들이 이 수염을 사랑했다. 아돌프 히틀러가 기르지 않았었더라면, 지금도 윗입술 위에 살짝 있는 수염은 사랑스러웠을지 모른다. 당시 이 스타일은 인기 수염 스타일이었다.


올리버 하디와 찰리 채플린은 당시의 대스타이지만, 두 사람이 이와같은 수염을 기르고 세계를 자극시켜 남성들은 빠짐없이 흉내를 내었다고.


그러나 히틀러는 특히 채플린의 수염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다. 도시 전설이지만, 첫 히틀러는 당시 인기의 긴 카이젤 수염을 기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을 때, 가스 마스크의 방해 때문에 알맞게 깎은 것이 그 수염 스타일이었다는....


6. 휴고 보스



요제프 괴벨스가 나치 장교들의 유니폼에 대해서 고심하고 있었다는 것은 위에 설명했다. 가장 두려워한 나치 부대, SS로 알려진 나치 친위대 군복 디자인을 감독 한 것도 물론이다.


악을 나타내는 색으로 된 검정 일색의 정장과 모자에 달린 불길한 죽음의 해골은 공포를 불러 일으키는 데 충분하다. 괴벨스는 뮌헨의 재단사 휴고 보스에게 SS의 군복을 만들도록 지시. 당시 보스는 이미 나치 돌격대가 착용하고 있던 갈색 제복을 만들었었다. 돌격대는 민병대적인 부대로1934년 해체.


5. 디올



자신의 동생이 프랑스 레지스탕스 활동에 참여했고,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었지만, 디자이너 인 크리스탄 디올은 나치 고관의 아내의 드레스를 만들며 오로지 묵묵히 나치를 위해 일했다.


배신자, 독일의 개로 볼 수 있었지만, 고급 패션을 중간에 끊어지게 하지 않기위해 자신의 역할을 했을 뿐이라고....2차 세계 대전 전, 디올은 류시안 루론 유명 패션 하우스의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치의 프랑스 점령을 경험, 그는 새로운 사명을 발견.


프랑스를 패션의 수도로 존속시키기 위해, 디올 자신이 스스로 하우스를 시작. 그리고 디올은 전세계에 이름을 떨친 패션 브랜드가 되었다.


4. 루이비통



루이비통 가방은, 당시 유명한 전통 브랜드였다. 1940년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했을 때, 비시 정권의 시대였지만, 대부분의 패션 브랜드가 탄압으로 인해 문을 닫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루이비통은 점령과 전쟁 시대에서 살아남았다. 실제로 1940년대 초반 프랑스의 괴뢰 정권이 운영하던 호텔 뒤파크 1층에서 유일하게 영업을 허용 한 브랜드가 루이비통.


루이비통은 공개적으로 뻔뻔하게 나치에 협력하여, 이러한 권한을 획득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어쨌든, 전후 시장은 루이비통 자신의 독무대가 되었다는....




3. 반권위적인 하위 문화



나치 체제의 메인 테마는 뭐니 뭐니 해도 갈고리 십자가이다. 직각으로 구부러진 갈고리가 붙은 동일한 길이의 십자가가 교차하는 이 형태는, 고대에는 한때 신성한 평화의 상징이었지만, 히틀러와 그 측근들이 이를 채택하고 자신들 방식으로...


이후 슬프게도 갈고리 십자가는, 오명을 쓰게되었다. 이 심플한 디자인이 눈에 혐오감을 일으키게하는 것으로 되어버려, 굳이 이 기호를 이용하여 관객에게 충격을 주려고 하는 사람도 나타났다.


1960년대와 1970년대의 갱들은, 갈고리 십자가와 철 십자 훈장, SS 풍의 번개를 옷에 붙이는 휘장으로 사용했다. 전쟁이 끝난 이후...퍼포먼스로 아티스트들이 나치의 심볼을 차용.


2. 아시아 대중문화



인도네시아의 카페에서 차를 마시거나 일본인 소녀의 밴드 연주를 들으러 가거나, 대만 학교의 퍼레이드에 참가하면, 나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을 볼지도 모른다.


공개적으로 나치의 이미지의 모티브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2013년 인도네시아의 카페에서는, 나치를 테마로 한 자바 바를 오픈. 물의를 빚고 비난이 확산되어 결국 문을 닫게 되었다는....


1. 보이시한 여성 패션의 종언



1920년대 독일은 유럽에서도 뛰어난 패션 리더였다. 나치가 나타나기 전에 베를린과 뮌헨은 디자인과 고급 의류의 중심지였던 것이다.


하지만 히틀러가 권력을 잡고난 후, 그는 독일 여성의 국가 이미지를 새로 만들기 시작했다. 히틀러는 여자가 분별있는 검소한 옷을 입는 것을 좋아했다. 진정한 아리아 인 독일 여성의 아름다움은 검소함으로 빛난다고 주장했다. 화장도 매니큐어도, 화려한 옷도 필요없다는 것이다.


이 독재자는, 나치가 패션 업계를 좌지우지하는 것이 독일을 싸움에서 승리로 이끌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따라서 나치는 Deutsches Modeamt(제국 패션국)을 설립하여 여성의 옷을 규제했다. 조직의 규칙 하에서 여성들은 독일 소재로 만든 독일제 옷 밖에 입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