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집트의 수수께끼에 싸인 왕비 네페르티티, 미모에 숨은 정치력

고대 이집트 왕 아멘호테프 4세의 정비 인 네페르티티는, 아름다운 외모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 생애 대부분은 수수께끼에 싸여있다.

아멘호테프 4세는, 이집트 예로부터 다신교에서 태양신 아텐을 믿는 일신교로 개종하고, 과감한 종교 개혁을 한 파라오로 유명한데, 후에 자신의 이름을 "아쿠엔 아텐"(아텐신을 섬기는 자)이라고 고치고, 수도를 현대의 아말나로 옮기고, 그곳을 "아케토아텐"(아텐신의 지평선을 의미)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러나, 그 개혁은 오래가지 않았고, 아크엔아텐이 사망한 후, 이집트는 원래의 다신교로 회귀하였고, 그 후계자들은 왕의 이름과 공적을 역사에서 지우려 하였다. 아케토아텐은 버려지고 아크엔아텐과 네페르티티, 그 가족을 그린 예술품은 파괴됐으며, 두 유산은 수천 년 동안 묻혀 있었다.

 


■ 세계에 알려진 흉상

네페르티티의 영광이 현대에 되살아나는 계기는, 1912년 12월 6일 독일 고고학자 루트비히 볼하르트가 아말나 유적에서 네페르티티의 흉상을 발견하면서였다.

궁정 조각가의 공방터에서 발견된 흉상은, 3000년 동안 아주 좋은 상태로 보존돼 있었고, 볼하르트는, 발굴일지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가장 최근에 색칠을 한 듯한 선명함, 멋진 세공,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높은 광대뼈, 호리호리한 목, 마치 살아 숨쉬는 듯한 표정은 아름다움과 이집트 예술의 상징이 됐다.

그렇다고는 해도, 20세기의 서양 학자에 의해서 쓰여진 대부분의 이집트사에는, 네페르티티라는 이름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이들 중 많은 부분은 아크엔아텐의 종교와 정치개혁에 초점을 맞추었고, 네페르티티는 아름다운 왕비이자 어머니였다는 식의 들러리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에 의해, 그 역할은 훨씬 복잡하고, 국정과 특히 아텐을 믿는 일신교의 확립에 깊게 관련되어 있던 것 같다고 생각되게 되었다.

 


■ 네페르티티는 어떤 인물이었나?

네페르티티의 생애게 관해서는, 단편적인 기록만 남아 있는데, 언제 태어났고, 언제 죽었는지도 분명치 않다. 이집트 왕실의 무명 부모 닢에서 자랐다는 것만은 안다. 아멘호테프 4세의 아버지 아멘호테프 3세 때 탄생해, 풍족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당시의 이집트는 풍요롭고 안정적이었다.

네페르티티는 10대 때 왕위 계승자였던 아멘호테프 4세와 결혼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결혼 당시 나이는 그보다 훨씬 어렸다는 학자도 있다. 아멘호테프 4세는 20대 중반내지 30대 초반에 왕위를 계승한 뒤 재위 4년 만에 네페르티티가 정비가 됐다.

 


네페르티티는 왕비로서 이집트 역사상 어떤 여성에게도 뒤지지 않았던 지위와 명성을 거머쥐었다. 예술 분야에도 영향을 미쳐, 많은 회화와 조각, 건조물에 그려졌다. 이집트 학자 카라쿠니 씨는, 파라오의 "대무당, 이데올로기의 여신"과 같은 존재였다고 한다. 재위 5년째 이후 아멘호테프 4세는 종교개혁의 일환으로 아크엔아텐으로 개명했으며, 네페르티티에게도 네페르티티 아텐네페르티티(아텐의 아름다운 자의 미, 미가 찾아왔다는 뜻)라는 이름을 주었다.

종교 개혁을 성공시키기 위해, 아크엔아텐은 네페르티티를 필요로 했다. 네페르티티는 태양신 아텐 숭배에서 왕과 대등한 지위로 승격되었고, 그녀를 위한 신전까지 세워졌다. 결혼한 지 얼마 안돼 둘 사이에 딸 메리타텐을 낳았고, 이후 다섯 딸을 더 낳았다. 왕녀들은 신성한 혼인 결과 아텐신의 축복을 받고 태어났다고 믿어, 궁정 예술가들의 인기 소재가 되었다는. 아텐신의 축복의 햇빛이 왕실 일가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모습을 그린 예술작품도 남아있다.

 


아크엔아텐과 네페르티티의 치세는 이집트에 많은 변혁을 가져왔다. 수도는 다신교와 강하게 연결돼 있던 테베(현대의 룩소르)에서 약 400km 위쪽의 나일강 동쪽의 미개한 땅으로 옮겨졌다. 왕은 새로운 마을을 아케트아텐이라 이름짓고, 그곳을 일신교의 중심지로 삼았다.

 


■ 진화하는 미의 기준

이 아말나 시대로 불린 기원전 1349~1336년에 태어난 미술작품은, 네페르티티가 당시 중요한 존재였음을 말해준다. 얼마 안되는 기간이었지만, 이집트의 전통적인 미의 기준은 뿌리부터 뒤집혔다. 그 이전의 인물화는, 수천년 동안 지켜온 엄격한 기준에 따라 고도로 양식화됐다. 몸은 가늘고 평면적인 2차원 스타일로 얼굴과 몸은 옆으로 향했고 눈과 어꺠는 앞으로 향했다.

네페르티티 시대에 이것이 크게 바뀌면서 딱딱하고 어색한 직선은 자연스러우면서도 흐르는 듯한 곡선이 됐다. 아쿠엔아텐과 네페르티티의 그림에도 유연한 곡선을 사용했으며, 달콤한 입술, 긴 얼굴과 코, 갸름한 몸, 돌출된 배, 넓은 허리가 그려졌다. 남성과 여성 모두 남성적인 특징과 여성적인 특징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아텐신이 이집트인들에게 아버지이자 어머니임을 강조시키기 위해서였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생각하고, 파라오 역시 아버지와 어머니 역할을 모두 맡았고, 그로 인해 확고한 결속을 이루고 이집트에 축복을 가져다주는 존재였다.

 


■ 왕이 죽은 후

네페르티티 왕실은 원만해 보였지만 선대 아멘호테프 3세의 안정적 시대와는 달리 이 무렵 이집트의 문화 종교 정치 경제는 혼돈에 빠져 있었고, 멀리 떨어진 곳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겠다는 무모한 계획은, 막대한 비용을 필요로 했고, 이집트 전역을 혼란에 빠뜨렸다.

새 종교도 다신교에 기반한 문화 전체를 뒤흔들어 놓으려 하고 있었으며, 이집트에는 예로부터 쌓아올린 대규모 신관 네트워크와 신전이 있었고, 숭배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금과 국고 부담이 무거워 어린이를 포함한 많은 이집트인이 도시 건설 노동력으로 동원됐다.

이 무렵, 외국의 위협이 증가해, 국민은 보호가 필요했었지만, .이집트는 역사상 가장 번창했다고는 하나 도시 건설과 종교 개혁, 그들을 지원하는 체제 정비를 위해 막대한 자금이 쓰였고 나라 살림은 기울었다.

아크엔아텐은 네페르티티와 함께 17년간 이집트를 다스린 뒤, 40여세에 세상을 떠났다.그 후 이집트는 구체제로 돌아갔고, 아크엔아텐의 이름은 이집트사에서 말소됐으며, 그 기념비와 조각상들은 해체되고 파괴되었다. 아텐숭배는 폐지되고, 다신교 신앙이 부활했으며, 세금은 낡은 전통을 지키는 데 쓰였고 수도는 테베로 돌아갔다.아케트 아텐은 폐허가 됐고, 이후 3000년 이상 역사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