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에 떨게 한 최초의 전차, Mark 1의 개발 비화

제1차 세계 대전, 유럽 전선에서는 "참호", "철조망", "기관총"이라는 3종 세트가 출현했기 때문에, 보병에 의한 돌파도 기병에 의한 교란도 매우 어렵게 되었다.


서로가 진지에 포진한 채 대치하고만 있었고, 강력한 효과는 야간을 틈타 포격, 산발적 공격과 압도적인 방어로, 그저 시신만 늘어날 뿐이었다.


참호와 철조망과 기관총에 의한 방어 진지를 깨부수어 어떻게 적진을 돌파할 것인가....



이 방법을 찾기위해 장애 제거용 폭약 등 다양한 전술, 장비가 무수히 쏟아졌었는데...이때 영국은 좀 달랐다고나 할까...완전히 다른 접근 방식을 찾게된다.


그것이 바로 철조망을 밟아 부수고 참호를 넘어, 기관총의 공격에도 견딜 수 있는 강철의 괴물 "전차"였다.  영국이 최초의 전차 "Mark 1"를 개발하기 시작한 것은, 실전 투입하기 1~2년 정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참호전의 너무 큰 피해와 더 이상 진전되지 않는 전황에 대해, 각국 군부는 참호 진지를 돌파하는 방법을 여러 가지로 생각했었지만, 그 중에서도 영국 육군 중령 "어니스트 던롭 스윈튼"은, 당시 미국에서 실용화 된 무한 궤도를 힌트로, 강철로 만든 상자로 전선을 돌파하는 전투 차량을 생각해내었다.


당초 이 제안은 중령이 속한 육군에서 기각된다.


그러나 해군이 이에 관심을 보여 "육상 전함"으로 개발이 시작되었는데...



- Mark 1의 개발


이것, 보통 사람은 상상할수도 없는 무기에 관심을 표시 한 것은 "육상 전함위원회"를 조직하여 실제 전차 개발을 추진 한, 당시 해군 장관으로 후에 영국 총리가 된 "윈스턴 처칠"이었다.


총리가 되고나서 국익보다 승리다! 라고하면서 투혼을 보인 이 사람, 역시 어딘가 달라보였다.


어쨌든 본격적으로 "초호 무기"로 개발이 시작되었던 전차는, "물 운반 차(Water Carrir)"라는 닉 네임으로 개발이 진행되지만, 약칭이 "WC"라는 것으로, "TANK(탱크)"로 명칭을 개정, 시험 제작기의 롤아웃을 맞이하게 된다.


잘 보면 알겠지만, 이 닉 네임 명칭이 그대로 호칭으로 정착하여 "TANK=전차"가 된 것이다.




첫 번째 시험 제품이 등장한 것은 1915년 9월.


이 시점에서의 전차는, 우선 무한 궤도를 붙인 것으로 참호는 넘는 것은 효과가 있었지만, 목표의 단차가 있으면 그것을 돌파하지 못했고, 저면도 문제 투성이었다.


그래서 전용 설계의 차체를 채용하고, 순수한 군사 차량으로 만들어진 것이 "리틀 윌리"로 1915년 12월에 완성한다. 이 리틀 윌리는 현재 탱크에 연결되는 "차체 아래에 무한 궤도"라는 구조였다. 당시의 무한궤도 엔진 미션 기술은 참호를 돌파하고 울퉁불퉁한 노면에서 주파할 수 있는 능력을 충분히 얻을 수 없었다.


따라서 이 유형의 구조는 일단 폐안이되었고, 다음으로 "마름형 전차" 스타일로 개발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1916년 1월, 무한궤도가 차체 측면 사방을 둘러싸고, 측면에서 보면 다이아몬드로 보이는 프로토 타입 차량 "빅 윌리"가 선보이게 된다.


기복도 심하지 않고, 참호도, 철조망도 돌파할 수 있었던 빅 윌리는 그대로 양산화가 결정 "Mark 1"이라는 호칭을 부여, 실전 투입을 기다리게 되었다.



- Mark 1 전차의 스펙


그럼 Mark 1 전차의 성능은 어땠나?


먼저 구동은 좌우 사방 트랙으로 주행, 방향 전환은 회전 속도의 동기화를 이용하여. 물론 급선회 등은 되지 않았고, 방향 전환은 아주 천천히....


실전에 투입되었는데, 그렇게 큰 기대는 모을 수 없었고, 방향 전환은 형편없는 수준이었으며, 참호를 안정적으로 넘기 위한 후방 보조 바퀴가 방향 전환에 이용되는 수준이었다.


길이는 9.9m, 폭은 4.19/4.39m, 무게는 약 28t.


여기에 Daimler Knight 수냉 직렬 6기통 가솔린 엔진을 탑재했고 엔진 출력은 105마력이었다. 이렇게까지 차체가 커졌다는 기술상의 문제도 있었지만, 원래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참호를 극복하기 위한 무기였으므로 별로 사이즈를 작게 할 생각도 없었던것 같다.


그리고 전차의 대명사 인 장갑능력은 두께 8mm 정도. 이것은 소총탄은 어느정도 막을 수 있었지만, 기관 총탄이나 또 중기관총이나 포를 가지고 공격해오면 확실히 관통되어 버리는 수준이며, 당시의 화력조차 매우 불안 한 장갑능력이었다.


어쨌든 당시의 기술력으로는 이 엔진으로 움직이게 한것도 대단한...




- Mark 1 전차 데뷔


그런데 현대의 감각으로보면 상당히 불안해 보이는 스펙을 가진 Mark 1 전차가 실전에 투입되었던 것은 후에 벌어지는 "솜 전투"라는 대전투에서...



프랑스와 독일이 대치한 가운데, 프랑스 북부의 솜프 강변이 무대...프랑스, 영국을 비롯한 연합군은 사태의 타개를 위해 대공세를 도모, 그 때 전선 돌파 비밀 병기로 전차도 투입되었다.


당일까지 준비된 Mark 1은 60량 3개 중대라는 숫자였지만, 우선 운송중에 문제 등으로 11량이 탈락, 전장에 도달한 것은 49량이었다.


또한 당일 행동개시 시점에 가동 할 수 있었던 것은 불과 18량.


여기까지도 좀 불량스러운데, 실제로 전진을 시작하니 온갖 잡다한 문제점들이 불거져 나와 결국 적진까지 침투할 수 있었던 것은 겨우 5량이었다고.


그러나 이 5량이 미친 영향은 매우 큰 것이었다. 지금까지 본 적도없는 이상한 강철 기계가 굉장한 굉음을 내며 진지를 짓밟으며 전진....


이 영향은 무시 무시한 물건이었던 것 같고, Mark 1 전차가 돌격에 성공한 영역에서는 독일군이 힘한번 써보지 못하고 도망쳤다는 사실. 실제 한 것은 참호만 돌파했지만, 그 영향은 엄청났다는 것.


이 솜 전투에서는 미미한 영향이었지만, 군인에게 준 충격은 이후 각국이 경쟁적으로 전차 개발을 통해 엄청난 기세로 전차 기술을 발전시켜 나갔었던 것을 보면 그 영향은 엄청났다는 반증.


이렇게 데뷔전을 공포로 장식 한 Mark 1이었지만, 설계의 기초 사상은 참호전 전문으로 다른곳에 응용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세계 대전 초기에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세계에 "전차"라는 카테고리 자체를 탄생시킨 공과는 엄청나게 큰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